지나친 일본 무시풍조

임진왜란을 2년 앞둔 1590년 조선은 일본 내부 상황을 탐지하기 위해 첨지 황윤길을 정사, 사성 김성일을 부사로 하는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이들은 다음해 돌아와 다른 보고를 했다. 어전에서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빛이 빛나며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문했고, 김성일은 “도요토미는 그리 두려워할 인물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결국 황윤길의 말대로 도요토미는 다음해 대군을 이끌고 한반도를 유린했다. 당시 조정은 김성일과 같은 당파인 동인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황윤길의 보고는 무시됐다.

4백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이 보는 일본은 어떤 모습일까. 일본에 파견된 공무원과 상사 직원, 언론인 등과 얘기하다 보면 현재 한국에는 김성일 류의 일본관만이 판을 치고 있는 것같다. 정부당국과 민간 기업 가릴 것 없이 사회 전체가 “일본은 없다”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10년 이상의 장기불황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은 없다”는 철저한 무시론에서부터 “한국은 일본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는 실패학습론까지 다양한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모두 ‘일본의 실패’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

일본의 경제현실을 보면 이런 분석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유럽 등 서구의 언론은 불량채권을 과감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일본의 금융정책을 비판하며, 공적자금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투입해 단기간에 금융위기에서 빠져나온 한국을 배우라고 지적하고 있다. 20년 전부터 일본과 한국의 공업화를 모델로 하는 ‘룩이스트’(LOOK EAST) 정책을 제창해온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로 모하메드 총리도 최근 열린 경제포럼에서 “일본은 이제 목표가 아니고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반면교사’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것만이 일본의 전부는 아니다. 금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소니와 도요타자동차로 상징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일본 산업도 점차 경쟁력을 잃을 것이라는 주장을 인정한다 해도 일본의 저력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 학사 출신의 시마즈제작소 무명 연구원 다나카 고이치의 노벨 화학상 수상이다. 일본은 올해 노벨 물리학상까지 탔고 이제까지 배출한 12명의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9명이 자연과학 분야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 외교의 움직임이다. 일본 외교는 한국의 정쟁과 한-미 간의 틈새를 이용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착실히 확대하고 있다. 지난달 북-일 정상회담이 그 예다.

한국이 일본의 실패담이나 얘기하며 한가하게 정쟁을 벌이고 있을 시기가 결코 아니다.

(한겨레신문 2002-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