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넘어 국내진격 일제 놀래켜

광복60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열전 ④ 약관의 농민장군 이홍광(1910∼1935)

중국 랴오닝성 신빈(新賓)현 청 소재지에서 50㎞ 가량 떨어진 훙먀오쯔(紅廟子)향의 헤이샤쯔왕 마을. 지난달 26일 길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은 “성이 이씨인 조선족 사령관이 여기에 매장됐다는 얘기를 어릴 때부터 들어 왔다”며 “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른들은 모두 ‘이 사령’이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산을 오른 지 한시간여 만에 주민 치훙옌(55)의 도움을 받아 한 돌무덤을 찾아냈다. 햇볕 한 조각 들지않는 돌들에는 푸르스름한 이끼들이 잔뜩 끼어 있었다.

“이곳이 20년 전 신빈·번시(本溪)·환런(桓仁)현 당사((黨史)연구실이 합동 답사해 이홍광(1910~1935)의 무덤으로 확인한 곳이다. 주민 증언과 (길쭉한) 중국식이 아닌 (동그란) 조선식 무덤 형태 등을 볼 때, 부하 한진이 그의 주검을 수습해 매장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홍광 전문가’인 차오원치(曹文奇)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부이사장은 “당시 일본군이 주검을 훼손할까봐 이렇게 산속 깊은 음지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며 “조선인이 이홍광의 묘지를 찾아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현지 주민에게 ‘조선족 이 사령’으로 기억되지만, 남한에서는 철저히 잊혀진 이홍광. 죽어서는 숲 속 음지에 묻혔지만, 생전에 그의 항일투쟁은 눈이 부셨다. 1930년대 남만주 최초로 유격대를 창설해 수년간 일본군과 그 괴뢰인 만주국군에 맞섰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도 전개한 그는 남만주 항일운동의 전설로 남았다.

이홍광은 망국의 해인 1910년 경기도 용인에서 가난한 농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가난과 핍박에서 벗어나려고 1926년 지린성 이퉁현으로 이주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들어간 그는 1931년 7월 대원 7명으로 구성된 적위대를 꾸려 대장이 되고 농민운동과 항일투쟁을 이끌게 된다. 적위대의 별칭은 ‘친일파(개)를 때려잡는다’는 뜻의 ‘개잡이대’(타구대)다. ‘개잡이대’는 남만주 최초의 항일유격대인 반석유격대로 발전한다. 1933년 9월에는 중국인 양징위(楊靖宇)와 함께 300여명 규모의 동북인민혁명군 1군을 만들어 찐장이 됐고, 이듬해 11월 동북인민혁명군 1군이 2개 사로 재편될 때 1사 사장에 올랐다.

그의 신출귀몰하고 배포 큰 ‘기만전술’은 만주 항일투쟁사의 장쾌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1934년 봄 이홍광은 양징위와 함께 200여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류허(柳河)현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1만2천여명의 포위공격을 받게 된다. 이홍광은 예전에 탈취한 일본군복을 부하들에게 입혀, 새롭게 보충된 일본군 부대로 속여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일본군 부대와 교차하는 순간에는 기습공격을 감행해 2개 소대를 섬멸했다. 이어 식품과 탄약을 싣고 가던 일본군 차량을 세운 뒤 “왜 이리 보급이 늦냐”고 호통을 친 뒤 군수품을 가로채기도 했다.

이홍광의 두드러진 활약 중 하나는 평안북도 후창군 진공작전이다. 1934년 12월과 1935년 1월 이홍광은 200여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군(현 김형직군) 하성읍과 동흥성을 습격한다. 작전이 얼마나 신출귀몰했던지, <동아일보> 등은 “이홍광은 약관의 여비적(여자 도적)”이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차오원치 부이사장은 “교전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일본 불패 신화’에 타격을 줬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홍광은 1935년 5월 환런현과 신빈현 경계인 라오링(老嶺) 부근에서 200여명의 부하들과 행군하던 중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만나 교전을 벌이다 가슴에 총탄을 맞았다. 부하들은 끝내 적을 물리치고 그를 후방으로 후송했지만, 이내 숨이 멎었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 이홍광이 부하들과 토벌군을 네번씩이나 격퇴하며 주둔한 판스시 홍스라자 유적지의 안내석. 돌의 뒷면에는 양징위와 이홍광이 지도한 항일투쟁 과정이 새겨져 있다.


현재 남만주 일대에는 그의 짧지만 의미있는 생애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즐비하다. 지린성 판스시 조선족중학교의 이름이 홍광중학교이고, 학교 정면에는 ‘항일 민족영웅 이홍광 장군’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차오원치 부이사장은 “중국에서 그를 소개한 잡지나 논문, 전기가 1천여편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퉁현과 신빈현에도 이홍광의 기념비와 흉상이 있고, 광복 뒤 조선의용군 1지대는 ‘이홍광지대’로 이름을 바꿨다.

장세윤 고구려재단 연구위원은 “이홍광의 후창군 습격은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보다도 앞서 이뤄진 국내 진공작전이지만,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판스·신빈/글·사진 이순혁 기자


민족주의계 무장투쟁 양세봉, 이홍광쪽과 연합작전 시도

이홍광과 같은 시기에 남만주에서는 또 한 명의 걸출한 항일무장투쟁 지도자가 활동했다. 이홍광이 사회주의 계열의 대표였다면, 양세봉(1896~1934)은 민족주의 계통의 총사령관이었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기억을 품고 만주 항일투쟁의 명맥을 잇던 1920년대 참의부와 국민부에서 양세봉은 군사간부를 지냈다. 만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1929년 12월 조선혁명당으로 결집해 군사조직으로 조선혁명군을 창건했다. 양세봉은 1932년부터는 그 총사령관으로 수백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수십차례의 일본군 또는 만주국군과의 전투를 치러내며 영웅으로 각인됐다.

그런데 이홍광과 양세봉의 투쟁을 보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항일투쟁을 나눠 이해하는 것이 당시 상황에서는 도식적인 측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양세봉은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 군장 양징위(훗날 동북항일연군 1로군 사령관)와 두 차례 회담해 연합작전을 모색한다. 이홍광은 당시 동북인민혁명군 1사 사장으로 양징위 다음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정황은 양세봉과 이홍광의 연합 시도로도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양세봉은 1934년 8월 일제의 간계에 의해 매복에 걸려 순국하고, 이홍광도 이듬해 전사해 두 지도자가 본격적인 공동투쟁을 벌일 기회는 사라진다. 조선혁명군은 이후 동북인민혁명군과 활발한 연합작전을 벌이고, 1937년에 잔여 병력 60여명이 동북인민혁명군이 개편된 동북항일연군 1로군으로 들어간다.

두 지도자와 김일성의 관계도 눈길을 끈다. 1930년대 초반 동만주(북간도)에서 유격대 활동을 하던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에서, 1932년 사람을 보냈지만 이홍광이 출장 중이라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같은 해 여름 김일성은 남만주로 와 양세봉과 항일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본영 기자

만주, 왜 무장투쟁 요람 됐나

30년대 이미 100만 조선인 진출
양반·평민없는 공동체 항일 젖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일제가 노골적으로 조선 침략에 나서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일제는 친일세력을 적극 지원하면서 의병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탄압을 가했다. 결국, 상당한 손실을 입은 의병들은 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야 했다.

만주는 빈곤과 일제 탄압의 이중고에 시달리던 조선의 소작농들에게도 희망의 땅이었다. 추운 날씨와 척박한 땅으로 인해 고생이 많았지만, 수탈당하는 양이 적어 조선에서보다는 먹고 살기가 나았다. 그 결과 1910년 경술국치 당시 만주에는 이미 조선인 10만명 이상이 진출해 있었고, 그 규모는 20년대 50만명, 30년대 100만명, 40년대 150만명으로 급증했다.

나라 잃은 설움과 가난에 쫓겨온 조선인들이었지만, 고생 속에서도 나름대로 엄격한 공동체 규율을 세워 지조를 지켰다. 의병장 허위의 일족이자 석주 이상룡의 손부였던 허은씨는 <내 귓가엔 아직도 서간도 바람소리가>라는 구술집에서 “엄격한 도덕 규율을 어기면 양반, 평민 구분없이 마을 공동체에서 징벌을 받았으며 마을마다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교육했다”며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독립운동 군자금 갹출이 심했지만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누구나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고 말했다.

이런 풍토 덕분에 1906년 룽징(용정)에서의 서전의숙을 시작으로 만주에는 신흥무관학교 등 여러 민족학교가 세워졌으며, 국내 3·1 운동에 발맞춰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자치 정부가 결성됐으며, 북로군정서(김좌진), 대한독립군(홍범도), 조선혁명군(양세봉), 동북항일연군 등 무장 항일투쟁 집단의 명맥도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1931년 만주사변 뒤 중국인과 조선인이 일본군 앞에서 공동운명체가 되면서 느슨한 항일 연합이 성사됐고, 광활한 산림지대 등 지세를 이용한 항일 유격전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한민족 고대사의 상징적인 지역인 만주는 20세기 들어서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무장항일 투쟁의 근거지가 됐다.

이순혁 기자

(한겨레신문 2005-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