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화려한 벚꽂뒤엔…일본 ''검은 속셈'' 있었나

1960년대 중반 이후 국내 곳곳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벚꽃(벚나무) 심기’에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은 거액을 들여 일본에서 벚꽃 묘목(苗木· 옮겨 심기 위해 가꾼 어린나무)을 비행기로 실어 날라 기증했을 뿐 아니라 진해의 경우 일본인 식물학자 등이 이후 자발적으로 수차례 방한해 비료를 주고 성장상태를 파악하는 등 정성을 쏟은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이같은 벚꽃 심기는 반일감정을 자극하며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확인돼 해방 20여년만에 벚꽃 심기가 다시 국민정서를 무시한 채 추진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남 진해 벚꽃의 ‘부활’, 국회를 감싸고 있는 여의도 벚꽃길, 일제시대 호남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가던 ‘수탈의 길’, 전군가도(전주∼군산 26번 국도)의 벚꽃길 등 상당수 국내 대단위 벚꽃 나무들이 이렇게 심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묘목을 기증했던 재일교포, 담당 공무원, 향토사학자들의 증언과 취재팀이 재일교포의 친지에게서 단독 입수한 관련 자료 등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서울시, 전라북도,진해시,군산지,전주시 등 해당 지방자치단체와 산하 기관엔 관련 기록이 전무했다.

이에 따라 ‘교묘한 문화 침투’라는 지적과 함께 이들, 특히 일본인들이 왜 한국의 벚꽃 심기에 발벗고 나섰는지 그 배경과 의도에 ‘역사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벚꽃 심기가 추진될 당시 국내에선 벚꽃 묘목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게 당시 실무자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벚꽃이 곳곳에서 베어져나갔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취재팀이 입수한 당시 ‘재일본동경진해유지회’의 묘목 기증 명단과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76) 회장의 기록에 따르면 1966년부터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 벚꽃 묘목 약 6만그루를 진해시에 기증했다. 여기엔 재일교포 10명과 일본의 중견 언론인, 식물학자, 관광회사 간부 등 일본인 15명, 전자회사 후지쯔(富士通), 동경항공 등 9개 일본 기업이 협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당시 기증을 주도했던 재일교포 문태일(76· 일본 사이타마현 거주)씨는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 ‘왜 원수의 나라 국화를 기증하느냐’는 비판이 많았지만 증오심만 갖고는 한일 관계에 미래는 없다는 생각에 기증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문씨는 당시 일본 NHK에서 대한방송 뉴스 진행을 맡고 있었다. 문씨는 일본인과 일본기업의 협찬에 대해 “친분이 있는 언론인과 기업에 협조를 요청했으며 이름만 빌려줬을 뿐 실제 돈을 낸 사람은 몇 안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문씨의 형 문시정(84·진해)씨는 “관광객 유치가 목적이었는데 일본인들이 기증에 나선 것은 진해가 러일전쟁 전승지인 것과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벚꽃 묘목 기증이 이뤄질 당시 진해시는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와 자매결연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가고시마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일본의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해군 대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의 고향이다.

1970년대 초·중반 국회 뒷길에 심어진 벚꽃 묘목과 전군가도에 심어진 벚꽃 나무도 전부 또는 일부를 재일교포가 기증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군산 월명공원의 벚나무 200그루는 일본 로터리 클럽이 기증한 것이란 증언이 나왔다. 군산시청 김중규 학예사(39)는 “전쟁후 일본인들은 과거 자기들의 식민지였던 지역에 자매결연이든 기술협약이든 인연이 닿게 되면 맨 처음 하는 일이 벚나무 기증이었다”며 “월명공원의 벚나무도 그렇게 기증된 것이란 얘기를 당시 군산에서 로터리 클럽 활동을 했던 분(사망)에게서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일본의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문화적 침략’”이라며 “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일본이 한반도내에서 자신들의 과거 (침략자로서의) 문화적 향수를 구현하기 위한 욕심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특별기획취재팀=류순열·김기동·신동주·박종현 기자

(세계일보 2006-4-4)

벚꽃의 비밀…일본, 겉으론 친선 속으론 "식민지배 그리워"

한일 친선인가, 군국주의 향수인가. 해방 이후 국내 벚꽃 심기에 재일교포와 일본인이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그 배경과 의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체로 재일교포의 묘목 기증 동기엔 그들 스스로 “고향 발전에 기여하고 싶었다”고 말하듯 애향심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증오심만 갖고 한일관계에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기증하게 됐다”(재일교포 문태일씨)거나 “일본 군국주의의 쓰라린 기억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보낸 것으로 전해들었다”(군산 향토사학자 김양규씨)는 증언 처럼 나름의 역사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씨는 “일본인들도 이런 뜻에 공감해 협찬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인들도 같은 입장이었을 것이라고 볼 만한 뚜렷한 근거는 없다. 정녕 그런 뜻이었다면 사과와 반성의 표현이 기록으로 남아있어야 할텐데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일부는 조선을 지배하던 군국주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듯한 흔적을 남겨 진의를 의심케 한다.

#재일교포의 애향심

“일본은 벚꽃을 국화로 삼고 있으며 따라서 벚꽃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한국인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지대합니다. 그러므로 진해를 벚꽃의 세계적인 고장으로 정비해 일본인 관광객의 한국유치의 단서를 마련하는 의미에서의 진해 벚꽃의 가치는 막중하다 아니할 수 없읍니다.”

재일본동경진해유지회가 작성한 벚꽃 묘목 기증·협찬자 명단 앞머리엔 이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이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공식적인 기증 취지다. 이같은 상업적 목적 외에 문태일씨는 “미래지향적으로 한일 관계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고향 발전에도 기여하고 한일 관계도 개선하자’는 취지였다”는 얘기다.

다른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시 기획관리실장이었던 손정목(78) 서울시립대 명예 교수는 “1971년 봄 재일교포 한 분이 애국심으로 벚꽃 묘목 2400그루를 서울시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시 녹지과장이었던 허형식씨(75)는 “60대 재일교포로만 기억하고 있으며 무슨 이유로 기증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국내엔 벚꽃 묘목을 생산하는데가 없어 고맙게 받았다”고 회고했다. 전군가도 벚꽃 기증에 대해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은 “1975년 전군가도 확장 당시 재일본 관동지구 전북인회 회원 2000여명이 700만원을 기증해 국가 및 시·군·도 예산 총 3500만원을 더해 6400여 그루를 심었다”고 말했다.

벚꽃 기증에 나선 재일교포들은 사업가나 언론인 등이었으며 드물게 범죄조직에 몸담은 이도 있었다는 증언이다. 문씨의 경우 NHK에서 대한방송 뉴스 진행을 맡고, 영어회화 학원을 운영한 성공한 교포였다. 문씨는 “1976년 1만그루를 기증하라며 100만엔을 내놓은 방모씨는 진해 출신으로 일본 어느 지방의 야쿠자(일본의 전통적 범죄집단) ‘오야붕’(親分·두목)이었는데 아주 점잖고 멋진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일본인, 왜 발벗고 나섰나

재일본동경진해유지회가 작성한 기증자 문건은 “일본인 유지 및 기업의 자청적(子請的)인 협찬이 있었다는 것을 명기해 두고자 한다”며 해당 기업과 협찬자 명단을 소개했다. 협찬자로는 히가시 노부오(東信夫· 사망· 당시 50대) AP통신 동경지국장, 구니미쯔 가즈시게(邦光一成·사망· 당시 40대후반) NHK프로듀서 등 중견 언론인 7명, 식물학자 나카무라 쯔네오(中村常男), 묘목업자 우다가와 다케오(宇田川猛夫), 요미우리 신문 기자 출신의 관광회사 간부, 마수다 유키히코(增田幸彦·70) 등 모두 15명이 기록돼 있다. 협찬기업으로는 후지쯔(富士通)주식회사, 동경항공, 일본콘살턴트협회 등 9개 기업·단체가 기록돼 있다.

문건에서는 이들의 ‘자청적 협찬’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제발로 협찬에 나섰다는 얘기다. 그러나 문씨의 설명은 다르다. 그는 “냉소적인 고향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해 친분이 있는 일본인들에게 협조를 요청해 대부분 이름만 빌렸을 뿐이며 실제 돈을 낸 사람은 히가시 노부오를 비롯해 서너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문씨에 따르면 히가시 노부오는 1940년대에 징집돼 만주에서 종군기자로 복무하다 일본 패망과 함께 소련군에 붙잡혀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경력이 있다. 이에 대해 문씨는 “캐나다에서 유학한 히가시 노부오는 종군기자를 하면서도 만주에서 조선독립군을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와줬다고 했다”고 말했다. 문씨는 또 “벚꽃 기증에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마수다 유키히코도 ‘추악한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문씨에 따르면 그는 요즘도 벚꽃철이면 “흘러간 꿈과 우정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며 문씨에게 안부 전화를 한다.

대부분 이름만 빌렸으며 같은 생각이었다는 문씨의 말과는 달리 몇몇 일본인들은 상당히 적극적이었고 생각도 달랐던 것 같다. 문씨의 형 문시정(84·진해)씨에 따르면 식물학자 나카무라 쯔네오, 묘목업자 우다가와 다케오, 관광회사 간부 마수다 유키히코는 수차례 진해를 방문해 비료를 주는 등 정성을 쏟았다. 마수다 유키히코는 처음 보낸 1만그루가 대부분 죽자 진해를 방문해 풍토 조사를 했고 우다가와 다케오는 벚나무가 병충해를 입지 않도록 약을 가져다 뿌리기도 했다.

이들은 진해시가 자기들이 기증한 묘목을 잘 키우지 못하는데 대해 불만을 나타냈고 이에 문태일씨가 김중도 진해시장과 심하게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문태일씨는 “기증한 나무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 ‘이런 시장은 잘라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그 다음날 진해로 가 따졌다”고 회고했다.

특히 마수다 유키히코는 진해 제왕산 꼭대기에 있던 러일전쟁 전승기념탑인 ‘일본해해전기념탑’이 철거된 데 대해 “그대로 보존했으면 일본 사람들이 많이 찾을텐데”라며 아쉬워했다고 문시정씨는 전했다. 이 전승기념탑은 이승만 정권 시절 진해 별장을 찾은 이 대통령이 “저걸 왜 그냥 두나”고 한마디한 뒤 바로 철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시정씨는 또 기증 재원에 대해 “그 당시 재일교포가 그리 큰 돈이 어디 있나. 돈은 일본 사람들이 거의 댔다”고 했다가 “(일본 사람이 댄 돈은 얼마 안된다는)동생말이 맞을 것”이라고 번복했다. 문태일씨에 따르면 당시 1만그루를 사서 비행기로 나르는 데 드는 비용은 150만엔 정도로 당시 NHK 초임(1만4000엔) 기준으로 거의 10년치 월급이다.

#무시된 국민정서

1960년대 중반 벚꽃 심기 운동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논거는 “왕벚나무의 원산지는 제주도”라는 학설이었다. 이는 1962년 박만규, 부종유 두 식물학자가 수차례 한라산을 답사해 자생 왕벚나무를 발견하고 발표한 연구결과였다.

하지만 이같은 연구결과가 발표되고도 벚꽃이 일본의 나라꽃이라는 인식은 여전했고 이 때문에 1960년대 중반 이후 벚꽃 심기 운동에 비판 여론이 형성됐다. 문태일씨는 “‘왜 일본놈 돈을 받느냐’‘왜 일본 나라꽃을 기증하느냐’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이병훈(82) 전 군산문화원장은 “전군가도의 경우 70년대초 재일교포의 기증으로 벚꽃길이 조성될 당시 상당한 반대가 있었는데도 당시 도청 등이 일사천리로 기존 가로수를 베어버리고 벚꽃으로 바꿔버렸다”고 회고했다. 향토사학자 김양규씨도 “일제가 곡물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것이 전군가도이며, 당시 재일교포가 기증하는 벚꽃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고 말했다. 서울시 녹지과장이었던 허형식씨도 “왜 국회 주변에 일본 나라꽃을 심느냐는 언론의 비판이 있었지만 원산지설로 돌파했다”고 말했다. 당시 비판여론에 대해 박상진 전 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는 “벚꽃이 일본을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로 이해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비판여론이 잠잠해진 데는 무엇보다 박정희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진해 사람들은 당시 박 대통령이 “진해를 세계적인 벚꽃 도시로 가꾸라”고 지시한 것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해 문태일씨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문씨는 “박 대통령이 진해 별장에 들렀을 때 진해시장이 벚꽃 심기 계획을 보고하자 박 대통령이 ‘좋은 생각’이라며 정부 예산을 배정해줬다 ”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벚꽃 심기를 지시했다는 증언도 있다. 허형식씨는 “서울 강변북로엔 박 대통령의 지시로 벚꽃을 많이 심었는데 병충해로 많이 죽었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

(세계일보 2006-4-4)